“회사는 하다못해 전구 한 개 값까지 지불해요. 영업을 위한 마케팅 비용까지요. 이 학원에 들어간 돈은 모두 회사가 냈습니다. 이 센터로 발령 온 것도 회사의 일방적인 지시였어요.”

서울에서 10년 넘게 학습지 교사 관리업무를 한 정선영(가명) 눈높이러닝센터 A센터장은 “근로자성이 있는데 아무도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눈높이 학습지’를 만드는 교육 회사 ㈜대교가 만든 학원 ‘눈높이러닝센터’를 관리한다. 매년 회사와 위탁사업자계약을 맺고 일하는 개인사업자다.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이지만 학원에 투입된 자기자본은 없다. 정씨가 주장하듯 대교는 학원에 필요한 ‘전구 한 개 값’까지 낸다.

본사 직원과 같은 일 하는 사업부제 관리자들

대교의 학습지사업은 크게 두 팀으로 나뉜다. 교사가 학생의 집을 방문하는 HL(Home Learning·방문)팀과 LC(Learning Center)팀이다. HL팀에는 특수고용 노동자인 학습지 교사, 교사를 관리하는 팀장, 지역을 관리하는 지점장이 속해 있다. LC팀은 ‘눈높이러닝센터’라 불리는 일종의 학원을 운영한다. 눈높이학습지를 교재로 가르치는 강사와 센터장이 센터에 있다.

소위 ‘사업부제 관리자’는 러닝센터장, HL팀의 팀장, 지점장을 통칭하는 말이다. 지점장, HL팀장, 러닝센터장, 심지어 교사 직군까지 본사 인력인 정규직과 섞여 일한다. 대교 본사 소속의 직원들이 HL팀장·LC팀장을 맡기도 한다. 회사의 요구나 본인의 필요에 따라 사람들은 팀을 오가기도 하고 직책을 오가기도 한다.

정 센터장도 올해 LC팀의 러닝센터장으로 오기 전까지는 HL팀에서 학습지 교사들을 관리했다. 지점장이기도 했고, 학습지 교사로도 5년 넘게 일한 경험이 있다.

정 센터장은 “본사 직원인 센터장과 섞여 완전히 같은 지위에서, 같은 직책으로 똑같은 일을 한다”고 말했다. 2018년까지는 같은 사내 전산망을 쓰기도 했다. 인사발령을 명령하는 공지나 공문도 정규직원과 구분하지 않고 본사에서 함께 받았다.

센터장이 제공한 서울 한 지역 사업국 조직도(2020년 10월 기준)에는 30여개 HL(방문)센터의 교사·팀장 연락처가 기재돼 있다. 이 중에는 대교와 직접 계약을 맺고 일하는 본사 정규직도 일부분 있었지만 직군이나 직책이 따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본사 직원과 위탁사업자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직원이다가 사업부제 관리자로 전환되거나 사업부제 관리자였다가 대교와 직접 계약을 맺고 일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출퇴근 상급자에 보고하고, 일방적으로 인사발령받는 ‘사업자’

정선영(가명) 센터장은 “본사에서 출결을 관리받고, 종속적으로 업무의 지시·관리·감독을 받아 왔다”고 설명했다. 센터장은 매주 혹은 격주로 본사가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본사 관계자는 사업부제 관리자들에게 월별 업무일정을 지시한다. 이들은 회원모집 방법 등을 본사에서 교육받기도 한다. 교육을 가지 못할 때는 본사에 교육불참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마케팅 비용은 결재를 받는다. 정 센터장은 “병원에 가서 출근이 늦게 되면 늦는다고 지점장에게 꼬박꼬박 보고도 했다”며 “평일에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7시반에 퇴근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고, 주말에도 출근한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들에게 인사발령도 낸다. 정 센터장은 지난해까지 HL팀장이었지만 올해 회사 명령에 따라 LC팀장을 맡게 됐다. 대교는 지난해 말 조직개편을 이유로 위탁사업계약을 맺는 HL팀장을 모두 LC팀으로 이동시켰다. HL팀장은 현재 대교의 정규직들만 맡고 있다.

이러한 인사이동은 이들의 수입과 직결된다. 이들은 소위 ‘총원’이라고 하는 과목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학습지를 구독하거나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수강하는 과목수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 그런데 회사가 지난해 일방적으로 인사이동을 명령하면서 자신이 기존에 관리하던 과목수보다 적은 센터로 배정받는 이들이 생겼다. 정 센터장이 맡고 있는 지점도 몇 달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정 센터장 동료들 중에도 인사이동에 반발해 그만두는 이들이 생겨났다. 특히 지난해는 코로나19로 방문수업을 하는 HL센터보다 학원 형태인 LC센터의 과목수가 감소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지난해까지 800개였던 러닝센터는 750개로 줄었고, 과목수가 일정 기준 이하인 곳들은 문을 닫거나 통합했다.

정 센터장은 “회사의 이런 대규모 인사이동이 현재 진행 중인 퇴직금 소송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며 “퇴직금 산정 기준을 낮게 만들기 위해 영업이익을 내기 어려운 학원들로 관리자들을 일괄 발령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원, 종속적 노무제공 인정하며 근로자 아니라고 판결

대교 사업부제 관리자들의 노동자성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다. 학습지교사와 사업부제 관리자를 지낸 퇴사자 15명이 대교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원고들은 부산지법과 부산고등법원(원고 4명)에서 모두 패소했고, 2016년 12월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하면서 소송은 마무리됐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이다.

부산지법 6민사부는 2015년 11월 “원고들은 대교에 상당히 종속적인 관계에서 일정한 노무를 제공해 온 점이 인정되기는 한다”면서도 △일반직원과 달리 학습지 교사는 취업규칙을 적용받지 않는 점 △대교의 업무지시와 독려는 위탁계약 의무를 이행한 일환인 점 △매월 지급받는 수수료가 실적에 따라 차이가 큰 점 등을 고려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학습지 교사들이 빠진 항소심에서는 사업부제 관리자들의 노동자성을 집중적으로 다퉜다. 부산고법 1민사부는 사업부제 관리자 역시 1심의 학습지 교사와 마찬가지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부산고법은 “동일한 지점장이나 팀장이 매월·매년 지급받는 수수료가 실적에 따라 상당한 폭으로 달라지며, 학습지 교사를 관리하는 업무는 이들의 재량에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또 “전속성을 단정하기 어렵고, 따라서 이들의 수수료가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대교 지역본부는 사업부제 관리자로부터 업무 내용과 결과를 보고받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회의와 교육을 해 실적 향상을 위한 독려를 했지만 이는 위탁계약상 의무이행 과정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370명 사업부제 관리자, 근로자로 인정될까

사업부제 관리자들의 노동자성 다툼은 올해도 이어진다. 현재 퇴직자 20명(지점장 16명, 러닝센터장 3명, HL센터장 1명)이 제기한 퇴직금 소송이, 퇴직자·재직자 350명이 함께 제기하는 연차휴가 미지급 수당·퇴직금·연장·야간·휴일수당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박상진 변호사(법무법인 우공)는 “이전 소송의 대법원 판결은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마무리돼 실질적인 대법원 판례로 간주되기가 어렵다”며 “지난 소송과 달리 이번 소송은 근로자지위에 관한 증거를 대폭 보강했다”고 강조했다. 퇴직자가 제기한 과거 소송과 달리 현재는 재직자들이 원고로 참여해 근로자지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이전 판례에서 다른 학습지회사나 정수기회사 영업조직 관리자의 노동자성을 다투는 판결에서는 특별한 기준 없이 재판부 성향이나 제출된 증거의 질에 따라 승소 여부가 갈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사건이 다른 사건에 비해 중요한 특징을 지니는 점은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이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교에는 소송을 진행 중인 사업부제 관리자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다수 있다는 뜻이다.

박 변호사는 부산지법·부산고법 판결에서 대교 주장과 달리 “사업부제 관리자의 겸직은 금지됐고, 다른 회사 제품을 취급하는 것은 계약해지 사유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회의 때 이들이 사시·사훈·사가를 제창하고 △대교가 업무수행에 필요한 사무실·비품을 모두 제공하는 점 △이들에 대해 정성평가를 포함한 인사평가가 이뤄지는 점 △실적과 관계없이 관리수수료로 매월 일정금액의 고정급이 지급된다는 점 △관리자들에게 경조사비·명절선물·건강검진과 같은 복지혜택이 제공되는 점에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맞다는 것이다.

정선영 센터장은 “(인사이동을) 원하지 않았지만 학습지교사, HL센터장, 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관리자’라는 명목하에 10년 넘게 일했다”며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를 견디고, 버티면서 수많은 직원들이 정리해고됐는데, 가장 약한 이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회사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